2020. 9. 18. 22:56ㆍPensiero in Pensiero/일상
소크라테스가 한 말은 아니라고 하지만,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좋아한다.
이 이야기는 소크라테스의 산파술 질의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산파법이라는 것이 간단하게 무엇이냐면,
Q : 정의란 무엇인가.
A : 강자들의 논리입니다.
Q : 강자들은 사람인가?
A : 강자는 동물일 수도 있지만, 인간세상에서는 보통 사람이지요.
Q : 그렇다면 보통 사람은 실수를 저지르겠지?
A: 그렇습니다.
Q: 그러면 강자들의 실수도 정의라고 할 수 있나?
A : 그렇다고 볼 수 없습니다.
Q : 그렇다면 정의란 무엇인가.
A : 올바른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Q : 그렇다면 올바르다는 것은 무엇인가?
A : 사람을 살리는 일이옵니다.
Q : 만약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선한자를 죽이는 것도 정의인가?
A :
이렇게 질문에 질문을 이어가서 마치 산파가 산모로부터 애를 받는 것과 같은 과정인 지식을 낳는 과정을 돕는 문답법을 이야기 한다.
결국 끝에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소 라고 나의 무지를 인정해야만 끝이 나는 그런 문답법이다.
그러니 나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 바로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다.
지난 2주는 그런 과정이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아무것도 모름을 증명하고, 아는 것은 왜 아는 건지 확인한 후, 허탈해지는.
때로는 소크라테스를 이겼다고 자만하며 설명하다 결국 소크라테스에게 깨지는 그 모습이 나였다.
그러나 무지에 대한 것은 인간에게 모종의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현대사회는 무지와 앎으로 사람의 계급을 나누고, 그걸 아주 어렸을 적부터 주입 받아온 우리에게는 사실 정말 모를 때의 그 천진난만함을 갖기 어렵다. 이럴 때서야 단 하루만이라도 어린아이로 돌아가고 싶다던 피카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어른이 되어서의 천진난만한 무지는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 두려워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른다고 말하는데에는 꽤나 큰 자신감과 자존감이 필요하고,
한 번 인정하고 나면 그 이후는 참 어렵지 않다.
지난 2주간 나는 그 벽을 허물었다. 나의 자신감과 자존감을 한층 쌓아올리면서 모르는 것을 인정하고
모르는 것에서 알고 싶은 것으로 바꿔나가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어를 내 친구, 토니에게 배울 때처럼, 작은 것에 감동하고 큰 것에 감사하며,
모르는 것을 넘어, 점점 나아가는 내 모습이 꽤 괜찮아서, 매일 아침 나는 귀엽다고 칭찬하고 있다.(나만 듣는데 뭐 어때)
그렇기에 매번 소크라테스적인 모먼트가 필요하다. 기술적으로도 그렇고 심적으로도 그렇다.
심적으로는 모른다고 말하면서 더 나아가려는, 더 질문하고 더 질문 받으려는 마음이 생긴 것도 그렇고,
기술적으로는 정말 내가 설명할 줄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하고, 설명할 수 있을 때까지 공부하는 것도 그렇다.
며칠전 페어가 물었다.
토익공부는 어떻게 해야하냐고
그때 나의 대답은 리스닝은 스크립트를 외웠고, 리딩은 많이 풀었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한 이유는 내가 아는 문장이여야 들을 수 있고, 내가 어디서라도 본 구절이고 문법이어야 이해가 쉬워서 그렇게 했다고 했다.
여기에 내 공부의 답이 있었다. 내가 우선 많이 알고, 모르는 것 더 찾고, 문제를 눈에 익히고, 개념을 설명하고 들었을 때 이해 할 수 있어야 그것이 내 것이 된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어찌된둥 언어라서 맥락이 비슷한가 했는데, 아니었다. 공부란게 원래 그런거였다.
나는 그런 직업을 택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이렇게 빠르게 직업의 특성을 익히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큰 산이 하나 더 있었다. 틀리는 것이 무서웠다.
왜냐면 나는 뼛속까지 한국사람이니까. 우리는 틀리면 안된다고 교육받았다. 피아노 학원을 가도 음악을 듣고 치고 싶은대로, 느끼는 대로 치게 하면 좋으련만, 피아노 원장님은 끝끝내 손등을 때렸다. 그때의 가는 줄은 사라졌고, 남에게 보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남아있다.
피아노 뿐이랴, 체육시간에는 뜀틀을 멋지게 넘지 못할 것이 무서워서 늘 머리가 아팠고,
그래서 여러명이서 하는 운동도 너무 두려웠고, 어릴 적 코딩은 천재같은 아이들 틈에서 교수님의 한숨을 들으며 배우다 결국 그만둬버렸다.(만약 그때 더 배웠음, 공대를 가서 개발자가 애진작에 됐겠지. 마이 돌아왔다.)
하여간 그게 뭐든 틀리는 게 무서웠다. 남들이 내가 못하는 걸 보는게 너무 부끄러웠다.
그런데 어젠가 그젠가 슬랙에 한 답글을 보았다. 앞으로 틀리는 것이 내 일이 될 거라는 문장.
생각해보니 개발자들 사이에 그런 밈이 있단다.
코드가 잘 돌아가면, 어? 이게 왜 돌아가지?
코드가 잘 안돌아가면, 어 이게 왜 안 돌아가지?
그렇다. 두번째는 안되고 틀리는게 당연한 특성을 가진 직업으로 선택하기로 했던 것이었다.
그 문구를 보면서, 테니스를 치던 날이 생각이 났다.
내가 수영, 펜싱 다음으로 좋아하는 운동을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그거슨 테니스다.
수영은 차가운 물 속에서 땀이 나는 게 좋고
(그래봐야 할 줄 아는 건 팔을 꺾지 않는 자유형과 배형이 전부지만)
펜싱은 딱 한 달 배웠지만 한시간 레슨에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다리가 아팠던 그 기억이 좋고
테니스는 강압적으로 끌려가서 쳤지만
나의 무엇인가를 넘어섰던 기억이라서 긍정적이고 인상적이다.
남들은 운동신경이 좋아서 테니스 채를 잡고 곧잘 공을 맞추기도 하더만,
나는 첫 날 끌려가서 치던날 10개 중 1개를 라켓에 맞출까 말까 했다. 거기다가 얼마나 힘들던지 30분만에 넋이 나가서,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다.
그래서 끝나고 다들 페어를 맞춰 팀플레이를 하는데,
나는 테니스장의 그 비싼 이태리재 흙을 신발이 온통 흙투성이가 되어 붉어질 때까지 벅벅 긁고만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주도, 그 다다음주도, 코치님의 이탈리아 스러운 칭찬을 받으면서,
(그 칭찬, 사실 별거 없는데, 무조건 잘했다. 다음엔 더 잘 칠 수 있다. 엄청 잘했다. 아깝다. 뭐 이런거지)
오늘은 1개 받아치고, 그 다음번엔 2개를 받아치더니 그 다다음 번엔 8개를 치고 있는 나를 봤다.
포기하지만 않고 계속하면 틀리다가도 맞는 날이 오고, 못하다가도 되는 날이 오고, 모르다가도 아는 날이 온다는 것을 느낀 나날이었다.
그 답글이 나에게는 그런 느낌이었다. 틀리는 게 무서운 내게, 틀리는 것이 당연한 직업이라고 설명해주는 그 문구가
테니스를 무서워하던 내게, 포기하지만 않으면 라켓으로 공을 칠 수 있다는 걸 느낀 순간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지난 2주는,
소크라테스적인 모먼트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는 기간이었고, 그걸 통해 다시 한 번 테니스를 치며 느꼈던 그 순간을 겪게 했던 날들이었다. 앞으로의 날들이 어떨지 모른다. 올해부터는 그런 미래에 대한 추측따위는 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지만 돌이켜보니 지난 2주가 꽤 뿌듯(?)해졌다. 그런 날들의 지속이라면 충분하다.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오늘이라면, 감사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행동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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