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 2. 07:26ㆍPensiero in Pensiero/여행
-
이탈리아에서는 새해를 맞이하는 카운트다운을 할 때, 불꽃놀이를 한다.
작년까지만 해도 나에게 크리스마스와 한 해의 마지막 날은 그저 휴일이거나,
혹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하지만 조금 시끄러운 그런 하루였다.
그러나 이번해는 조금 다르게 보낼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져,
남들은 매번 가는 불꽃놀이에 가기로 했다.
장소는 참 대단하게도 이천 년 전 로마인들이 전차 경기를 즐겨보던 전차 경기장, 치르코 막시모(Circo Massimo).
치르코 막시모는 크긴 하지만, 작년엔 거기서 불꽃을 보다 몇 명이 죽었다더라 라는 카더라 통신이 무섭기도 했고
불꽃이니 높이 쏘아 올릴테니 우리는 언덕에 올라가 보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자정 1시간 전부터 언덕에 올랐다.
그 언덕은 무려 이천 년 전 로마가 만들어진 캄피돌리오 언덕.
그리고 그 언덕 주변 어딘가에 치르코 막시모 쪽으로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
서 있던 자리에는 앉을 수 있을 것 같이 보이는 돌담이 하나 있었는데, 이 돌담은 아래쪽은 좀 낮고, 위 쪽은 점점 높아지는 비스듬한 경사면이었고, 올라가서 앉기에는 서 있던 곳의 높이가 애매하게 높아서 결국 앉지 못하고 벽에 기대 있었다.
그러나 서 있다보니 결국 다리는 아파왔고, 그 위로 어떻게 하면 올라갈 수 있을까 고민하다
조금 아래서부터 경사면을 따라 걸어 올라가기로 결심했다.
문제는 경사면 한쪽은 길이고 또 다른 한쪽은 절벽이라는 것이었고 그 절벽의 높이는 아찔하게도 높았다.
그리고 균형을 잡고 아찔한 높이의 돌담을 한 발 한 발 디뎌가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고개를 들어 세상을 보았더니 고대 로마유적의 모습과 새해를 기다리는 사람들, 가로등 불빛들이 너무 아름다워 보이면서도
알 수 없는 공포감이 느껴졌다. 분명 풍경은 아름다웠음에도 불구하고, 불안감과 함께 무서움이 함께했다.
높은 곳에 서 있을 때 덮치는 공포감, 불안감, 무서움과 기쁨, 행복은 참 특이한 감정이었다.
그러면서도 너무 당연한 감정으로 여겨졌다. 높은 곳에 있을수록 불안감이 느껴지는 건 자연적 섭리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한 양가적인 감정이 자연으로부터 도망친 인간이 만든 세계에서도 공통적으로 통용되는 것은 아닐까.
높은 자리라는 것이 과연 어디인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나라는 존재가 누군가를 책임져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것이 높은 자리에 있는 순간이라는 생각이 문득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 순간에는 그렇다면 그 자리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는 깨달음이 되었다.
속물적으로는 높은 곳의 아름다운 풍경과 같은 소중한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불안감,
개인적으로는 높은 곳에서 떨어졌을 때, 나의 모습의 처참함을 목도해야 한다는 공포감과 그 자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감,
공동체적으로는 책임지고 있는 모든 것들에 누가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
그렇지만 당장 느껴지는 풍경의 아름다움에서 오는 기쁨, 나만이 높은 자리에 있다는 희열과 우월감 등.
도덕적으로는 전자의 감정이 없는 사람은 높은 자리에 오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상에선 후자의 감정만을 느끼는 사람이 오히려 높은 자리에 오르기에 쉽다.
망설임 없이 넓은 보폭으로 높은 곳으로 올라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순간 손가락 끝까지 짜릿하게 전달되는 이 감정들을 느끼면서, 그 돌담에 앉았다.
그리고 불꽃놀이는 시작되었고, 그 높은 위치에서 얻은 깨달음 때문인가, 처음 본 새해의 불꽃은 생각보다 시시했다.
곧, 총선이다.
누군가가 나를 대표하여야 한다면 높은 곳에서 전자와 후자, 저 양가적인 감정을 함께 느끼는 사람이 300개의 좌석 중에 하나를 가져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
'Pensiero in Pensiero >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탈리아 로마] 트레비분수는 삼거리분수가 아니다. (0) | 2020.08.19 |
---|---|
믿음은 어렵다. (0) | 2020.01.07 |
최고의 신, 제우스는 왜 바람을 피우는가 (0) | 2019.09.03 |
박물관에는 왜 두상조각이 많은가. (0) | 2019.08.28 |
어떻게 죽어갈 것인가. (0) | 2019.08.18 |